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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연구자들이 GPU 대기 순번을 기다리며 실험 규모를 줄였다는 이야기, 저도 주변에서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런데 구글이 자사의 AI 가속기인 TPU를 한국 대학과 연구 기관에 직접 공급하는 방안을 정부와 논의 중이라는 소식이 나왔습니다. 엔비디아 GPU 중심으로 굳어진 시장에 균열이 생길 수 있을지, 기대와 의구심이 동시에 드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배경: 왜 지금 구글이 TPU를 들고 나왔나
구글코리아는 최근 정부 기술 혁신 인프라 회의에서 TPU 기반 인프라 협력안을 공식 제안했습니다. 내용은 크게 두 축입니다. 대학과 연구 기관에 TPU 장비를 제공하고, 로봇이나 자율주행 같은 물리적 AI 분야에서 공동 기술 개발을 진행한다는 것입니다. 공급 방식도 구글 클라우드를 통한 원격 접속만이 아니라, 기관 서버에 장비를 직접 설치하는 온프레미스(On-Premises) 방식까지 함께 제안했습니다. 온프레미스란 외부 클라우드에 의존하지 않고 기관이 자체 서버실에 장비를 들여놓고 직접 운용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데이터 보안 민감도가 높은 공공 연구 기관에는 의미 있는 선택지입니다.
이 움직임의 배경에는 명확한 시장 논리가 있습니다. 현재 글로벌 AI 가속기(AI Accelerator) 시장에서 엔비디아의 점유율은 압도적입니다. AI 가속기란 대규모 행렬 연산을 고속으로 처리하는 데 특화된 반도체 칩을 뜻하며, AI 모델 학습과 추론의 핵심 부품입니다. 출처: IDC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2023년 기준 AI 가속기 시장의 80% 이상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구글 입장에서는 TPU를 국내에 심어 레퍼런스를 확보하면 아시아 시장 전체를 공략하는 발판이 생기는 셈입니다.
한국이 협력 대상으로 주목받는 이유도 있습니다. 제조업 기반이 탄탄하고 반도체·자동차·로봇 산업이 고루 발달해 있어, 물리적 AI를 실제 산업 현장에 적용할 여지가 다른 나라보다 큽니다. 구글이 로봇과 자율주행을 협력 분야로 명시한 것도 이 강점을 겨냥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부 역시 특정 기업 의존도를 낮추고 공급 선택지를 넓히는 방향으로 AI 인프라 정책을 추진해 왔기 때문에, 타이밍 자체는 잘 맞아떨어집니다.
기술현실: 장비를 준다고 끝이 아니다
기사들을 보면 TPU 공급 자체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이 지점이 좀 걱정됩니다. 엔비디아가 AI 인프라 시장을 장악한 핵심 이유는 GPU 칩의 성능만이 아닙니다. CUDA라는 소프트웨어 생태계가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CUDA(Compute Unified Device Architecture)란 엔비디아가 개발한 병렬 컴퓨팅 플랫폼으로, 쉽게 말해 GPU 위에서 AI 코드를 돌리기 위한 언어와 도구 전체를 아우르는 환경입니다. 수천 개의 오픈소스 라이브러리와 20년 가까이 쌓인 레퍼런스가 이 생태계를 지탱합니다.
국내 연구자 대부분은 파이토치(PyTorch)와 CUDA 기반으로 코드를 짜고 있습니다. 제가 주변 연구자들과 이야기해봤을 때도, TPU 소식에 처음 반응은 "그래서 JAX는 누가 가르쳐 주나요?"였습니다. TPU는 구글이 개발한 XLA(Accelerated Linear Algebra)라는 컴파일러와, 이를 활용하기 좋은 JAX 프레임워크 환경에서 가장 성능이 잘 나옵니다. JAX란 구글이 만든 수치 연산 라이브러리로, 자동 미분과 하드웨어 가속에 최적화되어 있지만 파이토치에 익숙한 연구자에게는 낯선 언어입니다. 장비를 무상에 가깝게 준다고 해도, 연구자들이 기존 코드를 새 환경에 맞게 전환하고 팀 전체가 새로운 프레임워크를 익히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은 절대 작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 따져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구글의 TPU 공급 능력이 실제 국내 수요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구글은 자사의 AI 서비스 운영에 TPU 자원을 대거 소모하고 있습니다. 출처: Google Cloud TPU 공식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듯, TPU는 현재 v4·v5 세대까지 출시되어 있지만 클라우드 할당 대기 시간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협력 초기 단계야 소수의 대학에 시범적으로 공급하겠지만, 이것이 전국 연구 생태계를 바꿀 만큼 확장될 수 있을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 CUDA 생태계: 20년 가까이 축적된 라이브러리·레퍼런스, 연구자 재학습 비용이 전환의 최대 장벽
- JAX·XLA 전환 비용: 기존 파이토치 코드베이스를 새 환경에 이식하는 시간·인력 지원 주체가 불분명
- 공급 규모: 구글 내부 수요와 경합 가능성, 국내 전체 수요를 충족할 물량 확보 여부 미검증
전략: 한국이 주도권을 쥐려면
저는 구글의 이번 제안을 조건부로 환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론도 이해하지만, 연산 자원 선택지가 늘어나는 것 자체는 분명한 이득입니다. 오랫동안 GPU를 제때 확보하지 못해 실험 설계 자체를 축소했던 국내 연구 현장을 생각하면, 대안이 생기는 것만으로도 협상 테이블이 달라집니다. 구글과 엔비디아가 한국을 두고 경쟁하는 구도가 만들어지면, 한국의 조달 협상력은 지금보다 의미 있게 높아질 것입니다.
다만 협력의 조건은 한국이 직접 설계해야 합니다. 제가 이 사안을 들여다보면서 가장 먼저 챙겨야 한다고 느낀 것은 데이터 거버넌스입니다. 협력 과정에서 생성되는 연구 데이터와 성과물의 소유권, 국외 이전 가능 여부를 계약 단계에서 명확히 못 박아야 합니다. 온프레미스 방식을 제안받았다 해도, 장비 운용 중 발생하는 로그나 메타데이터가 어디로 흘러가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소프트웨어 잠금(Software Lock-in) 문제도 계약 조건에 담아야 합니다. 소프트웨어 잠금이란 특정 플랫폼에 너무 깊이 의존해 나중에 다른 환경으로 이동하기 어려워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개방형 표준을 활용하고, 연구자들의 전환 비용을 줄여 줄 교육과 기술 지원을 구글에 명시적으로 요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협력의 부속 조건이 아니라 핵심 조건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국산 AI 반도체 육성 전략과 충돌하지 않는 병행 설계가 필요합니다. 공공 인프라의 일정 비율을 국산 칩 실증에 할당하는 방식이 현실적인 절충안이 될 수 있습니다. 해외 장비로 당장의 연구 공백을 메우면서도, 국내 팹리스 기업들이 레퍼런스를 쌓을 공간을 함께 확보하는 구조입니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설계의 문제라고 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TPU가 GPU보다 AI 연구에 더 좋은 건가요?
A. 단순히 어느 쪽이 낫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TPU는 구글이 자사 AI 서비스에 최적화해 설계한 칩으로, JAX·XLA 환경에서 대규모 행렬 연산을 매우 빠르게 처리합니다. 반면 GPU는 CUDA 생태계를 기반으로 파이토치 같은 주류 프레임워크와 자연스럽게 맞물립니다. 어떤 연구를 하느냐, 어떤 소프트웨어 환경에 익숙하냐에 따라 체감 성능이 달라진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도 이 의견에 동의합니다.
Q. 구글 TPU를 쓰면 연구 데이터가 구글로 넘어가는 거 아닌가요?
A. 클라우드 방식이냐 온프레미스 방식이냐에 따라 다릅니다. 클라우드로 원격 접속하면 데이터가 구글 서버를 거치게 되고, 온프레미스는 기관 내부에 장비를 두는 형태입니다. 다만 온프레미스라도 운용 로그나 메타데이터가 어떻게 처리되는지는 계약 조건에 명시되어야 하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데이터 거버넌스를 계약 핵심 조건으로 못 박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국내 연구자들이 TPU로 갈아타기가 현실적으로 가능한가요?
A. 쉽지 않다는 게 솔직한 답입니다. 기존 파이토치 기반 코드를 JAX 환경에 맞게 다시 짜는 작업은 팀 전체의 시간과 역량을 상당히 소모합니다. 전환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구글이 교육과 기술 지원을 체계적으로 제공하지 않으면 장비를 받아도 활용도가 낮아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협력 성패의 핵심은 하드웨어보다 이 소프트웨어 지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Q. 국산 AI 반도체랑 이번 협력이 충돌하지 않나요?
A. 충돌할 수 있다는 우려는 타당합니다. 해외 가속기를 대거 들여오면 국산 칩이 레퍼런스를 쌓을 기회가 줄어들 수 있습니다. 다만 공공 인프라의 일정 비율을 국산 칩 실증에 할당하는 병행 전략을 설계 단계에서 함께 추진한다면, 둘이 반드시 충돌하는 관계는 아니라고 봅니다. 정책 설계의 문제라는 시각도 있고, 저도 그 방향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결론
구글의 TPU 공급 제안은 단순히 장비 하나를 더 들여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AI 인프라 시장의 경쟁 구도를 바꾸고, 한국의 협상 테이블을 키울 수 있는 기회입니다. 제가 이 사안을 들여다보면서 느낀 건, 기회 자체보다 조건 설계가 훨씬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데이터 거버넌스, 소프트웨어 잠금 방지, 국산 칩 병행 육성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협력 설계 단계에서 명확히 담아내지 못하면, 나중에 협상 레버리지가 없는 상태에서 끌려다니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선택지가 늘어나는 것은 분명 좋은 신호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선택지가 또 다른 종속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조건을 꼼꼼히 설계하는 것, 그게 지금 한국 정부와 연구 기관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